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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신이 감춘 소녀

by 총천연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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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포스터

신이 감춘 소녀

여기에 소녀 치히로가 있습니다. 치히로네 가족은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길을 잘못 든 바람에 이상한 터널에 도착하게 됩니다. 기묘한 공간을 지나 도착한 곳은 어느 평원. 그리고 마을입니다. 치히로의 부모님은 마을의 주인 없는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부모님을 말리던 치히로는 포기하고 마을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하쿠를 만나게 됩니다. 하쿠는 치히로에게 해가 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말하지만, 부모님을 놓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치히로의 부모님은 돼지가 되어 있습니다.

 

밤이 되면서 이상한 존재들 신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치히로는 설상가상으로 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쿠는 신들의 음식을 먹여 치히로를 구하고, 유바바의 온천장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가마 할아범과 린의 도움으로 유바바와 계약하며 온천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유바바와 계약하면서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센으로써 일하게 됩니다.

 

하쿠가 여러 모로 치히로를 돕지만, 치히로의 일은 힘겹기만 합니다. 모든 것이 이상한 이 세계에서, 치히로는 부모님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변화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하기로, “세상에 나갔을 때 원래부터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내면의 잠재된 힘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이 작품을 성장물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최종적으로 터널을 나오면서 다시 움츠러드는 치히로의 모습입니다. 책임감 있게 일하고, 일견 용감하게 모험을 떠나던 치히로의 모습이 다시 소심한 소녀의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은, 그런 책임감과 용기가 원래 치히로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지, 치히로의 성장이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재된 모습을 보일 수 있게끔 되는 것이 또 성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이런 해석이 조금 더 우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치히로가 이름을 잃어버리고 센이 되었다가, 이후 다시 치히로의 이름을 되찾는 것도 그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해석에 따라 보는 장면은 달라지겠지만, 이러한 연출은 극중 다른 캐릭터에서도 굉장히 다채로운 형태로 나타납니다. 치히로의 부모님이 돼지가 되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도 비슷한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연출로만 그렇고, 그 안에 의미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치히로처럼 이름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이름을 되찾게 되는 하쿠에게서도 그런 연출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에게도 많이 유명해진 가오나시를 예로 조금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가오나시의 뜻은 얼굴 없음인데, 얼굴처럼 생긴 가면을 쓰고 다니지만, 정작 입은 가면 아래에 존재하는 기괴한 요괴입니다. 가오나시는 아주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본래 가오나시는 기척이 적어 종업원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데, 치히로만이 눈 여겨 보다가 가오나시를 온천 안으로 들어오게 해줍니다. 이로 인해 가오나시는 치히로에게 호의를 보입니다. 치히로는 어린 아이라 물욕이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오나시가 호의로 준 것들은 모두 거절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가오나시는 흉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도 치히로만이 가오나시에게 질문을 던지며 순수하게 받아들이지요. “어디서 왔어?’, “친구는?” 다른 종업원들은 가오나시가 뿌리는 사금 덩어리들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에 비해 무척이나 대조적입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문제를 일으키던 가오나시는, 치히로가 먹인 경단을 통해 먹은 것들 것 토해내고 다시 최초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나서는 얌전히 치히로를 따릅니다. 있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이지요.

 

유바바의 경우는 변화의 자도 보이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마녀 캐릭터이죠. 작품 중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숨기지도 않고, 변화시키지도 않은 채로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는 유바바가 유일할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실제로는 내재되어 있던 모습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는 힘들어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도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유바바의 아들인 보우입니다. 보우는 처음에는 심술이 가득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자기와 놀아주지 않으면 팔목을 부러뜨린다는 등 험악한 말로 협박하는 보우는 마치 현대 사회의 영악한 어린이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모인 제니바의 술수로 쥐로 변한 이후 치히로와 여행을 떠나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정말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보우가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 캐릭터들의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변화와 성장, 그리고 내재된 것들에 대한 생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과연 어디까지가 내재된 것이고, 어떤 것이 성장하는 것일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서는, 치히로가 보여주는 모습이 성장이 아니고 본래 내재되어 있는 것을 꺼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럴까요? 어쩌면 그렇게 내재되어 있는 것을 꺼내는 것 자체가 성장이라 부를 만한 것이지 않을까요?

 

보통의 영화들이 굉장히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는 반면,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 영화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소녀인 치히로가 주인공이어서 그런지, 굉장히 신선하고, 가볍지는 않지만 뭉클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를 던져줍니다.

 

신을 둘러싼 소문

마지막으로 두어 가지 재밌는 포인트들을 소개해 드리면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제목인 행방불명에 대한 것인데요. 본래 일본어로 카미카쿠시()’는 직역하게 되면 신이 숨겼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소제목인 신이 감춘 소녀도 그것을 본을 따온 제목입니다.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들어서 행방불명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지만, 본디 일본에서는 사람에 의한 실종을 행방불명이라고 하고, 원인 모르게 사라지는 것을 카미카쿠시 신이 숨겼다고 표현한다고 하네요.

 

이렇게 신이 숨겼다라고 하는 표현은 한국인들에게는 낯선데, 이는 일본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일본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앙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야오요로즈노카미 – 800만 신이 사는 나라라는 표현도 있다고 합니다.

 

다른 썩 좋지 않은 소문도 관계되어 있지만, 여기서 글로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다른 커뮤니티에서 조금 더 찾아보시면 쉽게 찾으실 수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검색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로 간단하게 평을 하자면, 이 작품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기에도 훌륭한 작품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극중 인물의 변화를 중요시하면서 영화를 보는데, 인물 내면의 큰 변화 없이 에피소드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도 이렇게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게 놀라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정서 및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인터뷰 또는 이 이야기가 쓰일 당시의 일본 배경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난 후에 영화를 보신다면 훨씬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입니다.

 

(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인터뷰를 먼저 보고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영화를 먼저 보고 감독 인터뷰를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처음에 볼 때는 이 영화가 당연히 성장물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D 감독 인터뷰에 따라서 감상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도 재밌는 포인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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